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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신비

NASA와 우주 위성 산업

by 차눙s 2023.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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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SA와 우주 위성 산업

나사(NASA)는 이렇게 태어났다

펜타곤과 CIA보다 11년 늦은 1958년에 창설된 NASA(National Aeronautic and Space Administration)는 머큐리 계획-제미니계획을 거쳐 69년 7월의 아폴로계획으로 달 착륙에 성공해서 (NASA는) 불멸의 이름이 되었다. NASA의 로켓 발사기지 케이프케나배럴은 2000년 대선에서 커다란 혼란을 일으켰던 플로리다 주에 있지만, 당초에는 나사를 위한 기지가 아니었다. 투르만 대통령 시대에 소련과의 수폭 개발 레이스를 주축으로 하는 냉전에 돌입하자 설립된 지 얼마 안 된 국방총성은 48년에 미사일 시사(試射)를 위한 토지를 물색했고, 기상조건을 검토한 결과 지구의 자전 방향으로 로켓이 궤도에 진입하기 쉽게 바람이 잘 부는 케이프캐나베럴을 선택했다. 군부가 펜타곤 건물에 함께 들어가 있어도 육해공군에는 각각의 상징적인 의식이 있고, 50년대부터 독자적인 미사일 개발을 다투었다. 육군은 레드스톤, 주피터, 해군은 폴라리스, 공군은 북유럽 신화 토르에서 따온 소(Thor), 아틀라스, 타이탄, 미니트맨 등을 속속 이곳에서 발사해 성능을 다투었다. 폰 브라운 박사를 영입했던 노스아메리칸 에비에이션이 이 개발에서 핵심이 되면서 이 미사일 개발 경쟁이 쿠바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미국이 주력한 것은 오로지 전쟁용 로켓과 미사일이지만, 57년 10월 4일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발사에 성공했다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소련도 독일의 로켓 과학자를 다수 확보하는데 성공했었다. 11월에 소련이 두 번째도 성공했기 때문에 덜레스 형제가 움직이는 백악관은 초조해졌다. 미국은 그다음 달, 인공위성 발사에 실패했고, 소련과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졌다. 미국이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한 것은 다음 해인 58년 1월이었다. 3월에도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3호의 발사에 성공한 미국은 10월 1일 국방총성으로부터 독립한 우주개발 전문 기관으로 NASA를 설립했다. 그런데 그 직후인 59년 1월에 NASA의 발사기지 케이프캐나베랄 바로 앞에서 쿠바 독재자 바티스타 대통령이 도미니카로 망명하고, 쿠바 반정부군이 수도 아바나를 점령하는 비상사태가 발생했고, 같은 날 소련이 축포처럼 우주로켓을 쏘아 올렸다. 그리고 2월 16일에는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 총리에 취임함으로써 쿠바혁명이 성공했다. 한 치의 여유도 없다고 판단한 미국은 5월 28일 육군이 원숭이 두 마리를 태운 중거리탄도미사일 주피터를 케이프캐나베랄에서 발사해 대기권 안에서 생존한 상태로 회수하는데 성공하자, 7월 2일에 소련이 그것을 비웃듯이 개 두 마리와 토끼 한 마리를 태운 로켓을 우주에 쏘아 올린 후 회수에 성공했고, 훨씬 더 높은 상공을 비행했다. 이것으로 멈추지 않고 9월 14일에는 소련 우주로켓이 달에 도착했고, 10월에는 우주정거장에서 촬영한 달 뒷면 사진을 발표해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이것이 군사용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소련이 미국 전역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상황이 되었다. 다음 해 1960년 1월에 소련이 다단식 탄도로켓을 발사해 12,000km를 비행해 태평양의 예정된 수역에 2km 오차 안에 착수하자 미국 본토 공격의 위험성은 더 높아졌다. 이러한 가운데 61년 1월 쿠바와 외교관계를 단절한, 백악관에 들어간 것이 젊은 대통령 존 F. 케네디였다. 그러나 그가 취임해 3개월도 경과하지 않은 4월 12일에 소련은 유리 가가린 소령이 탑승한 인류 최초의 인간위성선(人間衛星船) 보스토크 1호 발사에 성공하고, 지구를 한 바퀴 돌고 1시간 반 후에 무사히 귀환한 가가린은 "지구는 푸르다"라는 말을 남겼다. 얼굴이 파랗게 질린 CIA 전 장관 덜레스의 계획으로 쿠바에 동란이 일어난 것은 그 3일 후로, 16일에는 CIA가 조직했던 반정부군 전투부대가 쿠바에 상륙했지만 궤멸되었다. 미국은 다음 달 5월에 머큐리계획으로 앨런 셰퍼드가 최초로 유인 우주비행에 성공했지만, 우주 궤도에는 진입하지 못하고 겨우 15분 비행에 그쳤다. 그래도 셰퍼드는 영웅이 되었고, 이것을 기회로 포착한 케네디가 5월 25일 의회에서 유명한 연설을 했다. "미국은 우주개발 예산을 확대하겠다. 우리는 10년 이내에 인간을 달에 보내고 그들을 무사히 귀환시키겠다." 이 10년 이내라는 말은 "70년까지 NASA가 수행해야 할 아폴로 계획의 의무"라고 말한 것처럼 되어, 로켓 개발 기술이 군용기 메이커로부터 더한층 강하게 요구받았다. 동독이 베를린에 동서를 분단하는 장벽을 건설했던 61년에 미국 국민이 소련에 이기기를 정부에 요구했고, 케네디 형제에겐 고난의 해이기도 했다. 이것은 그다음 해였던 62년의 최대 위기의 전조(前兆)였다. 62년 2월 20일, 미국이 존 글렌 중령이 탑승한 인간 위성선 프렌드십 7호 발사에 성공해 지구를 3 바퀴 비행하고 대서양에 착수하여 무사히 회수했다.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전투기 조종사로 활약하고, 전투기 설계에도 참여했던 글렌은 미국인 최초로 우주궤도를 비행한 인물로, 라이트형제, 린드버그, 휴즈 이후 하늘의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그 후 상원 의원이 되어 핵병기 확산을 통렬하게 비판한 미국의 지성으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글렌의 우주비행 성공

글렌의 우주비행 성공은 케네디의 자신감을 회복시키고, 4월에는 텍사스 주 휴스턴에 유인 우주비행센터 건설이 시작되었다. 8월에는 "서베를린을 소련이 침공하면 핵병기를 사용하겠다."라고 후르시쵸프를 위협하는 작전을 내밀었다. 소련이 쿠바에 무기 수송을 개시한 것은 그다음 달이었다. 10월 16일,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고 있다는 것을 미국의 항공촬영으로 탐지했고, 국가안전보장회의 긴급 위원회가 소집되었지만 핵탄두의 존재는 확인하지 못했다. 러스크 국무장관, 맥나마라 국방장관, 맥스웰 D. 티이라 통합 참모본부 의장, 카티스 르메이 공군 참모총장 등이 호전적인 주장을 했고, 선제공격 주장이 회의를 주도하는 분위기였다. 제2차 세계대전 최후의 태평양전쟁에서 존 매케인과 함께 B29로 도쿄 대공습을 했고,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 투하를 실행했던 사령관 르메이는 제임스 스튜워드 주연의 "전략공군 명령"에서 묘사되었던 군인으로, 가장 공격적인 인물이었다. 쿠바에서 핵미사일을 발사하면 5분 이내에 미국 대도시 대부분이 순식간에 궤멸되는 것으로 추정되었고, 10월 22일에 케네디가 처음으로 국민에게 상황을 설명했고, 해상봉쇄를 명령해 전 세계에 엄중 경계 체제 조치를 하달했다. 이에 대해 소련도 다음 날 전군에 휴가 취소를 명하고, 24일에는 전 세계의 미군이 대소(對蘇) 공격 태세에 들어간 가운데, 미국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핵탄두가 쿠바에 도착했다. 마침내 지구 최후의 날이 가까워진 것이다. 이후 숨 막히는 백악관의 공방과 미소 비밀교섭이 연일 이어진 2주일 후, 마지막에 소련이 쿠바로부터 미사일을 철거함으로써 세계가 소멸될 뻔했던 쿠바 위기가 수습되었다.

그렇지만 막대한 수의 핵탄두 미사일은 21세기 현재까지도 지구상에 남아있는 상태다.

쿠바 위기는 2000년에 케빈 코스너 주연의 "13 Days"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지만, 할리우드가 이 소재를 취급한 배경에는 NMD 개발이 있었다. 이 이야기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것은 위기의 주역들이다. 머큐리계획으로부터 제미니계획으로 이어진 65년 6월 3일, 제미니 4호에서 처음으로 비행사가 우주선 밖으로 나가 활동했고, 66년 3월 16일에는 우주에서의 비행선 도킹에 성공한다. 그리고 마침내 69년 7월 20일 케네디 대통령의 유지(遺志)대로 미국은 사람을 달에 보내 달 표면에 첫 발을 밟은 뒤 무사귀환에 성공했다. 21세기 모두(冒頭)부터 거슬러 올라가 32년 전에 이 신의 업무(神業)를 성사시킨 미국의 두뇌와 비행기술은 경탄할 만하다. 우주에서의 정밀한 궤도 계산에 필수불가결한 것은 크게 진보한 컴퓨터 덕분이었다. 누가 이것을 성공시켰냐고 묻는다면, 우주비행사는 아니다. 군인들이 중역실을 차지하고 있는 미사일 메이커, 휴스턴 유인 우주비행센터, 케이프 캐나 베랄 기지를 통괄하고 있는 NASA이다. 그뿐 아니라 NASA의 세포는 모두 군수산업이었다. 우주비행의 첫걸음이었던 머큐리계획의 주계약회사는 맥도날드 항공기(후의 맥도넬 더글러스)이며, 그 산하에 로켓 기술의 영웅 노스 아메리칸 에비에이션, 컨베어(旧 발이 항공기), 크라이슬러 미사일 부문, 노드롭, 벨 항공기, 록히드, 그라망, 포드 모터, 텍사스 인스툴멘트, IBM이라는 군수산업의 회사 이름이 열거된다. 새 대통령 케네디가 61년 2월부터 NASA 장관 자리에 앉히려고 했던 것은 주계약회사였던 맥도넬 항공기의 중역 제임스 웹이었다. 취임 직후에 소련의 가가린에 선두를 허용한 웹이 "아폴로 달 착륙으로 미국의 역전승"을 케네디 대통령에게 건의했고, 곧 장대한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핵병기 원료인 플루토늄 제조를 발전시킨 카 마기 사의 중역도 겸임하고 있었다. 비행선이 도킹했던 66년 당시, 이미 NASA 관계자는 미국 전역에서 40만 명에 이르고 있었다. 케이프 캐나베랄은 쿠바 위기 다음 해부터 73년까지 케이프케네디라고 불렸고, NASA 로켓 발사기지는 케네디 암살 후에 케네디 우주센터로 개칭되었는데, 이러한 역사적 경과를 보는 바와 같이, 쿠바 위기에서 지구 최후의 날을 손짓한 것은 미국과 소련의 우주개발 경쟁이며 이 핵병기 개발 레이스가 다시 우주개발 레이스를 가속하게 된 것이다.

우주개발 레이스

특히 80년대 이후, 해군 소장에서 우주왕복선 비행 국장 그리고 이어서 NASA 장관이 된 리처드 툴리를 필두로,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 주임을 거쳐 공군 우주 사령관과 케네디 우주센터 소장을 역임한 포레스트 매카트니, 또는 국가미사일방위구상의 주력회사가 되었던 TRW의 전신 라모 울리치의 탄도미사일 연구소장에서 NASA 장관이 된 제임스 플레처 등은 모두 쿠바위기 때부터 전쟁 엑스퍼트(Expert)였다. 민간분야에서의 NASA 활동으로는 기상관측과 위성방송의 빼어난 업적이다. 그러나 의미를 상실한 핵병기와 미사일 개발에서의 NASA 활동은 대부분 이해하기 어렵고, 그들의 지성에 의문이 든다. 답변으로 나온 것은 엄청나게 방대한 종업원의 실업문제였다. 2000년에 부시Jr.와 고어의 치열한 대통령선거에서 NASA 우주기지가 있는 플로리다 주 대법원은 민주주의의 대변자처럼 소개되었는데, 플로리다 주에는 그 배후가 흥미 깊은 부호들의 역사가 있다. 기지에서 남쪽으로 가면 부호들이 모여 있는 마이애미비치가 있고, 북쪽으로 가면 센트 오거스틴 마을에 프랭크 칼레지가 있다. 그곳에 세계에서 가장 호화스러운 폰세 드 레온 호텔을 건설한 것이 헨리 프래글러였다. 그는 미시간 주에서 장사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록펠러라는 형제를 곡물 세일즈맨으로 고용했고, 오하이오 주 클리브랜드에서 록펠러 앤드류스 프래글러라는 석유회사를 시작했는데, 그것이 순조롭게 잘 되어 1870년에 스탠더드 석유라는 회사를 설립했고 록펠러와 함께 경영했다. 1911년 스탠더드 석유의 트러스트가 해체될 때까지 넘버 2로 군림했던 그는, 다른 한편에서 플로리다의 매력에 빠져 궁전 같은 호텔을 짓고, 쿠바 상회의 지배자로서 마이애미를 지배했다. 또한 플로리다 동해안 철도의 오너로서 주 내(州內)에 1,000km의 철도를 보유하고 있는 철도 왕국을 세웠다. 13년에 세상을 떴을 때 유산이 1억 달러라는 거액이어서 문제가 일어났다. 첫 부인이 1883년에 죽자 그녀의 간호사였던 18세 연하의 아이다 슈즈와 결혼한 프래글러는 다른 한편으론 남부의 명문 케넌 가의 클래식 가수인 피아니스트 메어리와 동거했다. 부인인 아이다가 노발대발하자 너 따윈 죽여 버릴 수 있어 라고 협박했지만 그녀의 태도가 수그러들지 않고 날이 갈수록 거칠어지자, 프래글러는 그녀를 뉴욕 교외의 산나트리앰으로 보내버리고, 메어리에게 100만 달러짜리 오리엔탈 진주와 다이아몬드를 약혼 선물로 줬다. 그런데 당시 그가 살고 있던 뉴욕 주에서는 이혼이 불법이었다. 프래글러는 정계, 언론계, 실업계를 분주하게 오가며 이혼의 필요성을 호소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자 플로리다 주에서 이혼을 추진했다. 플로리다 주에서는 간통의 경우에만 이혼이 허용되는데, 그가 주지사와 법조계에 12만 달러 이상의 뇌물을 공여해 "불치의 정신병도 이혼이 가능하다"라는 내용으로 주법(州法)을 개정시켰고, 1901년 법안이 의회를 통과하자마자 그날 밤 이혼을 해버렸다. 즉각 메어리 케넌과 결혼한 71세의 플라글러와 34세의 신부는 37세 연하였다. 그녀는 거액의 주식과 현금을 결혼 축하금으로 받았고, 두 사람은 팜 비치 호반에 지은 호화 저택에서 살면서 연일 파티가 이어졌다. 낭비벽이 있는 메어리는 파티에 한 번 입었던 옷을 두 번 다시 입지 않는 것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후에 플래글러와 메어리는 거대한 유산을 놓고 차례차례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이것이 1세기 전의 플로리다 사법계였다. 1세기 후 스탠더드 석유 이권의 일부를 텍사스 주에서 획득한 부시 가에서 두 번째 대통령 조지 부시Jr.가 탄생했고, 동생 제프 부시가 플로리다 주지사로서 대통령선거 개표 결과에 이의를 제기한 플로리다 주 사법계를 지켜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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